러시아의 제2의 도시인 성페테르브크는 우리에게는 소련시대 때의 이름인 레닌그라드로 알려져 있다.
이 도시는 혁명때까지 제정러시아의 수도였던 만큼 지금도 러시아 문화와 예술, 역사, 관광의 중심지이다. 인구 470만으로 모스크바에서 북서쪽으로 850여km떨어진 북위 60°에 위치하고 있다.


라도가 호수에서 발원하는 네바강이 시내중심을 통과해 핀란드만으로 흘러들어가는 델타지역에 형성된 자연의 섬과 운하에 의해 생긴 인공 섬들 위에 도시가 형성 되었다.
도시 초창기 41개의섬의 수는 101개이며, 365개의 다리(교외까지 625개)에 의해 묶여진 물의 도시 북쪽의 베니스라고도 불린다. 공원과 광장, 궁전터가 많아 북의 빠르미라고도 일컬어지며 백야의 여름에는 북구의 오아시스로서 편안함을 안겨 주는 곳이다.
지금부터 300년전 표트르대제가 스웨덴과의 북방전쟁(1700-1721)에서 적의 침입을 막기위해 피터폴요새를 건설하면서 이 도시가 막을 올린다.
하지만 스웨덴군은 한번도 이곳까지 오지도 못하고 결국 21년간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표트르대제는 러시아 최초로 바다로 나갈 수 있는 발틱해를 확보한다. 이곳에 서구에서 건축가, 원예가등을 초빙하여 항만과 도시를 건설하며 1712년 5월16일 수도를 모스크바로 부터 옮긴다. 그리하여 이곳은 혁명이 난 다음해 다시 모스크바로 천도 할때까지 200여년간 러시아제국과 영욕과 운명을 같이 하게된다.


러시아의 민족시인 푸시킨이 이곳을 유럽을 향한 창이라고 표현 한 것과 같이 페테르부르크는 서유럽의 건축 양식뿐 아니라 문화 사상을 함께 이도시로 수입하게에 이르른다.
이것이 후에 제정러시아를 뒤흔든 여러가지중 한가지의 씨가 되고 결국은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성공한 진원지가 되게된다.
19세기전반의 러시아는 페테르부르크를 중심으로 서구문화의 개화기에 접해 각분야에서 눈 부실정도의 발전과 근대화가 진행된다. 그 중 조국전쟁에서 승리하여 파리에 입성하고 돌아온 젊은 귀족과 청년장교들이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계몽사상을 갖고 돌아와 정치는 이민주의를 향하게 된다.


마침내 1825년 12월14일 니콜라이1세 즉위식날 12월 당원들인 젊은 장교들은 원로원광장에 모여 충성서약식 대신 농노제 폐지와 전제정치폐지를 요구하며 데카브리스트란을 일으킨다.
반란은 피를 뿌리며 진압되지만 이것은 후에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혁명까지 이어지는 시발점이 된다. 새로운 사상 풍조가 끊임없이 받아들여지며 마침내 알렉산드로2세는 1861년2월19일 농노제를 폐지하지만 인민주의자들의 혁명운동은 19세기 말까지 계속 빈발한다.


1905년1월9일 일요일 어용노조 지도자 가봉신부가 주도하는 시위대는 지금의 모스크바역 봉기광장에 모여 니예프스키대로를 지나 동궁으로 향하였으나 까자끄 기마병과 근위대의 발포로 5천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는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민심은 황제 니콜라이 2세로부터 멀어진다.


1차 대전 중 황제가 전선을 지휘하고 이었던 1917년1~2월 대중들의 동맹파업과 시위가 전국에서 일어났다. 2월26일 파블로 스키연대 1개중대가 시위진압 중 최초로 반란을 일으켜 다음날 저녁 무렵엔 6만6천여명의 병사들이 인민들편으로 돌아서면서 전제정부는 무너진다.
3월2일 황제는 퇴위하며 가족과 함께 푸시킨시 짜르스꼬예 셀로의 궁전에 무장 강금된다.
2월 부르조아 혁명후 스위스에 망명하고 있었던 레닌이 4월3일 귀국하여 모든 권력은 노동자와 농민에게라는 구호를 내걸고 4월 테제(April Theses-1917년 러시아혁명 기간중 망명지인 스위스에서 귀국한 V.I.레닌이 발표한 혁명전술)를 발표하면서 부르조아 임시정부의 자본주의 노선과 그에 동조하는 멘쉐비키들에 대하여 지속적인 투쟁을 한다.
레닌은 7월 핀란드로의 재망명을 거쳐 10월7일 비밀리에 귀국하여 볼쉐비키의 무장봉기를 서둘러 마침내 10월26일 새벽 2시경 동궁의 하얀식당에서 임시정부의 각료들을 체포하면서 최초의 사회주의 소비에트 정권을 탄생시킨다.


1차 세계대전중 이던 당시는 페테르부르크가 독일 언어에서 온 단어라 하여 이름을 삐뜨로그라드라 불렸던 이 도시는 1924년 레닌사후 그의 혁명과 공적을 기리기 위해 레닌그라드로 개명되었다. 소련붕괴후 다시 제정러시아때의 이름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성 페테르부르크는 어느곳을 가나 러시아의 역사, 문화와 관련하여 살핀다면 의미있는 여행이 될 것이다.


지금 일부학자들과 언론인, 정치인들 사이에서 다시 황제를 세워 입헌군주국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있다.
옛날 제정러시아의 사회 상황과 비슷한 점이 많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말할 수 있다.
러시아의 혁명가·정치가. 본명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Vladimir Ilich Ulyanov)이며, 공식명인 니콜라이 레닌은 1902년경부터 사용한 필명이다.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의 중심인물로서 독일파 마르크스주의자 K.카우츠키의 사회민주주의에 대립하여 마르크스주의를 후진국 러시아에 적용함으로써 러시아파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킨 혁명이론가이자 사상가이다.


볼가 강변의 심비르스크에서 교육자의 아들로 태어나, 1887년 황제 알렉산드르 3세의 암살 계획에 참여하여 처형된 맏형 알렉산드르의 영향으로 혁명에 뜻을 두기 시작하였다. 카잔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는 한편, 1870년대에 플레하노프에 의하여 러시아에 도입된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여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이후 혁명운동에 투신하여 체포와 유형의 세월을 거친 뒤 1900년 국외로 망명, 1903년 브뤼셀과 런던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당 제2차 대회에서 당원 자격 문제로 마르토프와 맞서 직업 혁명가 주의를 관철시킴으로써 볼셰비키(다수파)가 되었다.


1917년 2월혁명 직후 독일이 제공한 봉인열차(封印列車)로 귀국하였다. 같은 해 11월 7일 무장봉기로 과도정부(過渡政府)를 전복하고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표방하는 혁명정권을 수립한 다음, 소련의 공산정권을 지키기 위하여 1919년 제3인터내셔널인 공산주의자 인터내셔널(약칭 코민테른)을 결성하였다. 1922년 뇌일혈 발작으로 와병, 마지막 1년은 실어증(失語症)까지 겹쳐 병상에서 지내다가, 1924년 사망하였다.


※ 4월 테제(April Theses-1917년 러시아혁명 기간중 망명지인 스위스에서 귀국한 V.I.레닌이 발표한 혁명전술) 3월혁명 후의 혼란한 정치 정세의 분석과 혁명의 예견 및 그에 대한 볼셰비키당의 기본적인 전술을 나타낸 것으로 그 내용은 전쟁에 대해서, 러시아혁명의 성격, 임시정부에 대한 태도, 계몽활동, 소비에트공화국, 토지 국유화, 은행관리, 당의 임무, 인터내셔널의 부활, 생산과 분배의 관리 등 10항목으로 되어 있다. 레닌은 처음에 이것을 “당면한 혁명에 있어서의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의 임무”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하여 사회민주원 모임에서 발표했고 그 뒤 볼셰비키 위원회에서 발표했는데 모두 그것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제7차 러시아전당대회에서 이것이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 라는 슬로건과 함께 당의 기본방침으로 받아들여져 ‘7월 위기’와 10월혁명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만약 유럽의 모든 길들이 로마로 통한다면 페테르부르크의 모든 길들은 넵스키 대로로 통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해군성에서 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까지 4.5㎞로 뻗어 있는 이 거리에는 모든 것-최고의 호텔,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레스토랑과 카페, 상점들, 음악당 등-이 위치하고 있다.


1710년에 처음으로 길이 뚫리게 되면서 습한 늪지대였던 이 곳은 페테르부르크를 대표하는 문화, 상업의 중심지이자 가장 아름다운 거리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다. 모이카, 그리바이도바, 폰탄카 등의 3개의 운하가 대로를 가로질러 네바강으로 흘러 들고 있는 이 곳에는 19세기에 건축된 화려한, 그러나 그리 높지 않은 건물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더욱 더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표트르대제의 청동기마상 남쪽에 있는 이 성당은 100t이 넘는 금으로 장식되고, 유럽각지와 국내에서 생산된 112가지 돌로 내부와 외부의 기둥 등이 꾸며져 있다. 알렉산드로 1세때인 1918년부터 1958년, 그의 조카 알렉산드로 2세때까지 3대에 걸쳐 무려 40년간 10만명이 넘는 농민들이 동원되어 지어졌다. 페테르부르크가 습지대인 관계로 기초만 다지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당시의 22인의 에술가가 참여하고,물자를 운반 하기위하여 최초로 네바강에는 바지선이 띄어진다.


동서 길이 111.2m, 남북 폭 97.6m, 높이 101.5m, 수용인원 1만4천명의 규모 를 자랑하고 내부는 성서의 장면이나 성서속의 성인들을 150명 이상이나 묘사해 놓고 있다.
모자이크화도 62점이나 되며 우랄산맥에서 생산 된다는 초록색의 공작석으로 만든 모자이크 조각기둥 등은 바티칸성당과 비교하여 내부의 화려함은 보는 이들을 놀라게 한다. (예언자, 에덴의 동산, 에지기에리의 꿈, 예수의 고난, 최후의 심판, 대홍수, 천사 가브렐라의 전언등) 또한 이 성당을 설계하고 공사 감독한 프랑스인 몽펠랑은 약관의 20대에 전 유럽인이 참가한 콩쿨에서 입상하여 40년간 러시아에서 이성당 및 성당주위의 마린스키 궁전등 건물과 겨울궁전내 지금의 1호 전시실인 피터대제의 방, 궁전광장등을 꾸미는데도 참여하고 러시아에서 인생을 마감한다.


그는 러시아에 묻히길 원했지만 당시는 이미 다른 황제인 알렉산드로 2세는 그의 시신을 파리로 돌려 보냈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서양사회 치고 역술을 즐기는 러시아에서 당시의 유명한 점장이가 성당이 완공되면 그는 죽을 것이라고 초창기에 예언했다는 것이다.
데카브리스 광장은 레닌그라드와 깊이 연결되어 있는 2가지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하나는 광장의 끝에 서 있는 표트르 대제 동상 '청도의 기사' 이다. 무력으로 여제의 자리를 차지한 에카테리나 2세(1762-96)는 독일 출신이었는데, 표트르 대제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과시하기 위하여 1782년에 이 동상을 프랑스 조각가 파르콘에게 만들도록 했다. 이것은 러시아 최초의 기념 동상으로 푸슈킨의 서정시 [청동의 기사]에서 그 이름이 유래된다. 또 하나는 1825년 12월, 전제 정치와 농노제에 반대한 청년 귀족들이 이 광장에서 혁명을 시도했던 사건이다. 데카브리스란 '12월에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 이라는 뜻으로 데카브리스 광장은 그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름 붙여졌다.
이삭성당의 북쪽뒤로 소련시대때는 지까브리스뜨 광장이라 불리웠던 원로원 광장이 여름에는 수목과 어우러져 있다. 광장끝 네바강변에 있는 청동 기마상은 쿠테타로 남편을 죽이고, 황제자리에 오른 독일 출신인 예카쩨리나 2세 표트르대제의 후계자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하여 1782년 역시 프랑스의 조각가 파르콘에게 이 동상을 만들도록 하였다.


전 유럽에서도 찾을 수 없는 말의 앞다리가 번쩍 들려 있지만 실제 동상의 무게를 오랜세월 지탱하는 것은 뒤쪽의 말 꼬리가 다리와 함께 삼각형을 이루어낸 조각술에 있다고 한다. 대 시인 푸시킨의 서정시 "청동의 기사" 에서 그 이름을 따온 것이며, 지금도 마르스광장의 꺼지 지않는 불과 함께 삐쩨르의 젊은이들이 결혼식이 끝나면 이곳을 방문 하여 꽃다발을 바치고, 사진을 찍을 정도로 표트르대제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짐작할 수 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또 하나는 1825년 12월, 청년장교를 주측으로한 전제정치에 대한 러시아 최초의 반란이 이곳에서 일어났고, 피를 보고 즉위한 니콜라이 1세는 한층더 반동정치를 강화한다.
기마상 좌측 길건너에 위치한 제정 러시아 최초의 관료들의 건물인 원로원은 지금은 역사서적, 관련 서류등을 보관 관리하고 페테르부르크 지역의 모든 박물관 및 유적지를 관리하는 곳으로 쓰여지고 있다.
네바강 건너 맞은편에는 페테르부르크 최초의 석조궁전인 멘쉬코프 궁전과 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어문학부와 중앙사무처 건물이 위치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비천한 마부의 자식인 멘쉬코프는 일찍이 모스크바의 뒷골목에서 소년 표트르대제를 알게 되어 스웨덴과의 마지막 큰전투인 쁠따바에서 큰공을 세우며 친구이자 충실한 신하로 피터의 사후까지 부귀와 권세를 누리다가 결국은 그가 사위로 맞이하려 했던 대제의 손자 표트르 2세에 의하여 시베리아 오비강 유역으로 추방당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피터 대제의 오두막 부근, "St.Petersburg" 호텔 바로 건너편에는 역사 적인 순양 한편이 영구정박하여 있다. 1897년부터 1900년에 건조되어 1904-05년 러일전쟁에 참가, 큰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었다. 7000톤급 일반 순양함에 불과했었던 이 함정은 1917년 10월 1일 오전 9시 40분에 함포 한방을 쏘아올림으로써 오늘날까지도 많은 방문객들을 맞이하는 관광명소가 되었는데 바로 그 신호탄 한발로 인해 러시아에서는 레닌을 선두로한 볼세비키 혁명이 시작된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육상전투를 위해 순양함의 대포만 떼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현재 이 곳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궁전광장이야 말로 페테르부르크가 "공개되어 있는 박물관"이라고 불리 는 이유를 확연히 보여주는 곳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광장의 북쪽으 로는 러시아 바로크 예술의 진수라고 알려져 있는 겨울궁전이 서 있고, 그 반대편으로는 카를로 로씨(Carlo Rossi)에 의해 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반원형의 개선아치를 갖춘 구참모본부가 위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광장의 중앙에는 1834년, 나폴레옹과의 조국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 하여 세워진 47.5m 높이의 알렉산더 원기둥이 서 있다.


궁전광장은 수많은 정치적인 사건이 일어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05년의 제1차 러시아 혁명의 발단이 되었던 "피의 일요일"날 시위가 있었던 곳이 이 곳이며, 볼세비키 통치기간 중 "단결된 평화시위"와 군사 행진을 위해 사용되어진 장소도 바로 이 곳이다. 민주화된 오늘날에도 갖가지 종류의 정치적 집회-민주주의자, 공산주의자, 무정보주의자, 군주제 옹호자, 반시온니스트 등의 및 문화공연이 이 곳에서 행해지고 있다.
넵스키 대로를 걷다 보면 길 한쪽 가에 아치형의 성당이 하나 위치해 있다. 이는 스트로하노프 백작의 농노 출신 건축 가 바로니킨(A.Varonikhin)에 의해 1801년부터 10년에 걸쳐 지어진 성 까잔 성당이다. 처음에 이 성당을 세울 무렵 바로 니킨은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기독교 정교회의 제단은 서쪽을 향해야만 했는데 그렇게 하려면 입구가 넵스키 대로를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즉 넵스키 대로 에서 볼 경우 성당의 측면이 보이게 됨) 이에 생각을 해 낸 것이 바로 석고대리석으로 1m정도씩 이어서 만들어진 94개의 콜린도 양식 기둥으로 성당의 주위를 둘러싸는 방법이었다.


카잔 성당이 완성된 후 러시아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지금도 성당 안에는 승리의 트로피와 상대군으로부터 탈취한 군기 등이 걸려있고, 이 곳에서 러시아 군대의 위대한 장군인 꾸뚜조프(Kutuzov)의 장례식이 거행되기도 하는 등 카잔 성당은 러시아 군의 영광을 상징하고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고대 러시아어로 즐거움의 들판이라 불렸던 이곳은 1710년에 와서는 전쟁의 들판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엘리자베스 여왕 때 현재 엔지니어 성이 있는 자리에 궁전이 들어서고 나서 이 들판은 황후의 초원(Tsarina's Meadow)으로 불리게 되었다.


군사조직 형성에 있어서 굉장한 정열을 쏟았던 파울 1세는 군사들의 퍼레 이드와 훈련에 있어 이 광장을 활용하였다.
그 때부터 이 광장의 이름은 마르스 광장(Field of Mars)으로 굳어졌다.


그 후 1917년에 있었던 2월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이 광장에는 "꺼지지 않는 불"이 세워졌다. 이 꺼지지 않는 불은 2월 혁명 당시 이름 없이 살해된 수 많은 사람들을 기리는 것이다
담록색의 벽에 하얀기둥이 조화를 이루고 주말 밤이면 야외등을 모두 밝히는 이 박물관은 네바강이나 광장쪽에서 바라만 보아도 러시아의 번영 과 제황시대의 기풍을 엿볼 수 있다.


세계 일류급의 박물관으로 황제들이 거주했던 겨울궁전과 4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1,050개의 방과 창문의 수가 2,000개, 120개의 계단이 있다. 방의 총 면적은 4만6천㎡, 이 거대한 건물안에 소장되어 있는 1만5천개의 회화, 1만2천개 조각품, 60여만개 발굴품등 총 컬렉션은 약 250만점이 넘는다.


지붕위엔 176개의 조각품이 서있다. 전시되어 있는 모든 작품들을 1분씩만 감상해도 5년이 걸린다는 곳이다. 양도 양이지만 그 내용이 초 일류급이다.
아버지와는 달리 굉장히 사치스러웠던 피터대제의 딸 엘리자베따는 프랑스식의 유행은 물론 정치, 사상까지도 동경하게 된다. 겨울궁전(1754-1762건축가 라스트렐리)을 짓기위해 백성들로 부터 더욱 많은 세금을 거두기 위해 그녀의 신하들은 주화의 무게를 늘리고, 주세를 거두기 시작한다. 그것은 백성들이 생활은 궁핍해지고 주머니속의 동전은 무거우면 그만큼 보드카를 많이 마실 것이며 그러면 주세를 많이 거둔다는 것이다.
그녀의 20년 재위 기간동안 제1의 황금기를 맞이한 귀족들은 여황제의 허영심을 부추키며 백성들의 피와 땀으로 이 궁전을 짓기 시작한다. 엘리자베따는 죽을 때 파리의 단골살롱에 외상값도 밀린채 옷장에서 1만5천여점이 넘는 옷, 구두 가발등이 나왔다고 한다.
제2의 귀족들의 황금기를 맞이한 에까쩨리나 2세때(1764) 유럽으로 부터 4,000여점의 회화를 수집한다. 그녀가 최초로 아끼던 시계의 방에서 손님들을 위하여 소장품들을 전시하면서 프랑스에서 온 에르미따쥐(고독의 장소, 오두막집)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 후에도 각종 예술품들이 계속되어 수집되었고, 미케란젤로, 레오나르드 다빈치, 렘브란트등의 중세회화 작품뿐만 아니라 근대 마티스, 피카소, 고호등의 작품, 각종 예술품들이 350개의 홀에 그리스, 로마, 이집트, 중세 서유럽 국가별, 러시아, 페르시아, 터어키, 중국, 비잔틴 및 일본관등에 나뉘어져 있다.


그리고 일반인에는 공개하지 않는 지하 보물실에는 제정 러시아시대의 각종 보석과 장신구, 왕관등이 보관되어 있다.
이 도시에 찾아오는 외국관광객들을 안내하는 가이드 자격증을 해마다 1,2월에 실시하는데 이곳을 시험으로 대체한다.
또한 그곳의 일반인들도, 처음 가는 방에서는 안내판과 안내원이 없으면 출구를 못 찾을 정도이고, 시즌에는 내국인 뿐 아니라 외국인 단체 개인들의 참관이 많아 2개의 출구를 줄을 서서 입장하고, 내부에서도 줄을 서서 다녀야 할 정도다.


현재 1층 전시실은 원시 및 고대 예술, 2층의 전시실은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비롯한 라 파엘로 등 이태리 미술, 세잔느, 고호, 고갱, 드가, 모네, 르느아르 등 인상파와 피카소, 마티스, 칸딘스키 등 20세기 초기의 예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3층의 전시실을 중점적으로 관람할 수 있다. 에르미타쥐는 이외에도 엘그레꼬를 비롯한 스페인의 그림, 렘브란트를 비롯한 네덜란드 작가들의 작품과 독일, 영국 등 유럽 여러 나라들의 우수한 명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지하 보물실에는 제정 시대의 보석과 왕관 등이 무수히 많다.
에르미타쥐에서 명품 중의 명품이라고 헐 수 있는 것은 앙리 마티스(1869∼1954)의 유채화 '붉은 탁자'(크기 80×220㎝)와 '춤' (크기 260×391㎝)을 비롯하여 피카소의 '부채를 든 여인', '개를 몰고가는 소년'등을 꼽을 수 있다. 그밖에도 르느와르, 세잔, 고갱, 고흐, 모네 등의 그림도 있으며 라파엘로의 그림과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성화 '베누아의 성모'와 '리타의 성모'가 있는데 현재까지 남아있는 다 빈치의 작품 중에서도 이름 있는 작품이다. 또한 프라 안젤리코의 '성모자와 천사들'(1425년작, 크기 80×51㎝), 렘브란트의 '플로라로 분장한 사스키아', 카라바조의 '류트 연주자', 이밖에도 마티스의 그림 '대화', '화가의 가족', '아내의 초상' 등이 있다.


<층별 전시품>
1층 : 원시문화 (11-33)
구 소비에트 동방 민족의 문화와 예술(34-66)
동방의 문화와 예술(80-97)
고대 세계의 문화와 예술(100-131)


2층: 러시아 문화 (143-198)
19세기까지의 서유럽 예술(207-302)


3층 : 근대에서 현대까지의 서유럽예술(314-350)
동방의 문화와 예술 (351-397)
고대 화폐(398-400)
카잔성당에서 오른쪽엔 그리보에도브 운하가 흐르고 있다. 상트 페테르 부르크시에서 가장 흥미롭고 아름다운 다리중에서 하나가 방코프스키 다 리이다.
이 다리는 운하를 건널수 있는 보행자용 다리로 황금빛 날개를 단 그리핀 (griffin - 독수리 머리 및 날개를 가진 보물을 지키는 사자)으로 장식되어 있다. 그리핀 두상위엔 유리로 만든 둥근등이 달려있다.
카잔교에서 다른 방향으로 발길을 돌리면 그곳에 이탈리아-그리보에도브 운하를 건널 수 있는 보행자용 다리가 또 하나 자리잡고 있다.
그곳에는 그리스도 부활을 기리는 5개의 둥근 지붕을 가진 사원이 있다.


(건축가, I. V. Malyshev & A. A. Parland 1887-1907) 피의 사원은 1881년 5월 1일 황제 알렉산드르 2세가 폭탄 테러로 이 곳에 서 암살 당한 바로 그곳에 세워 졌다.


1883년부터 25년동안에 걸쳐 만들어졌다. 16-17세기의 러시아 건축 양식 으로 디자인되었으며, 故 알렉산드르 2세를 추도하는 사원의 내부장식은 각기 다른 대리석으로 치장되었고, 수천개의 조각으로 구성된 모자이크로 처리되어 아름다움의 진수를 보여준다.


☞ 즉위식날 피를 보고 황제자리에 오른 니콜라이 1세는 그후 30년 통치기간을 자기가 살아 숨쉬는 한 러시아에는 혁명이 침투 하지 못할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강력한 전제정치와 무서운 경찰전횡 시대를 열었다. 그는 서구에서 러시아로의 자유사상 유입을 막기 위하여 유학 금지령과 함께 모든 유학생의 귀환령을 내렸다. 서구로부터 돌아온 유학생들과 혁명적 성향을 지닌 국내 지식인들은 '인민속으로'라는 신념을 가지고, 자유사상과 인민계몽을 위해 자신들의 신분을 감추고 공장의 노동자, 농촌의 농민들로 위장하여 인민들에게 접근하였다. 하지만 도시의 노동자들은 몰라도, 너무도 무지한 농민들에겐 이들의 사상이 먹히지 않았고, 반대로 농민들은 이들을 짜리의 경찰과 관리들에게 고발하여 인민주의자들의 농민계몽운동은 난관을 맞이하게 되자 일부는 다시 대도시로 돌아와 정부요인 및 반인민주의자들을 처단하는 개별 테러활동에 관심을 기울이며 1879년 농노 집안 출신 으로 노버러시야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일찍부터 인민주의 운동에 가담하였던 안드레이 이바노비치 젤랴보프를 지도자로 '인민의 의지'라는 중앙집권적 투쟁단체를 조직하여 혁명의 일부수단으로 강력한 테러리즘을 선택한다. 1879년 '인민의 의지'집행위원회는 알렉산드로 2세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고 그의 휴가여행 기차와 동궁의 황제식당, 짜리의 산책터등에 폭발테러를 하지만 모두 실패 한다.


1881년 3월1일 아침 황제가 미하일로프 궁전에서 동궁으로 출발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부유한 귀족이자 짜리정부의 고관의 딸로 졜 랴보프체포후 '인민의 의지'의 새로운 지도자가 된 소피아 삐로프스까야는 그곳으로 즉각 폭탄 투척대를 보낸다. 짜리의 마차가 기마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미하일로프궁전(기술자의 성)을 나와 예까쩨리나운하 기슭에 다다르자 테러리스트 르이사꼬프가 첫번째 폭탄을, 이어 마차에서 튀어나오는 황제에게 대학생 그리네비쯔끼가 짜리의 발밑으로 두번째 폭탄을 던져 짜리와 함께 죽는다.


바로 그 자리에 종탑등 지붕의 꼭대기가 양파머리 모양(반원형의 방패모양 고대 러시아 건축양식)을 하고, 종루, 탑, 외벽과 문짝, 창문 내부벽등이 모두 러시아 모자이크로 장식된 아름다움이 모스크바의 바실리성당에 버금가는 예수부활 사원이 우뚝서 있다.


이 사원은 죽은황제의 아들 알렉산드로 3세의 령에 의하여 1883년부터 손자 니콜라이 2세때인 1907년까지 24년동안 알페르드 알렉 산드로비치의 설계에의해 건축가 말릐쉬바등이 참여하여 만들어졌다. 이사원의 특징은 러시아전통 예술 모자이크로 건축이 이루어 졌다는 것이다.


사원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에게 흥미로운것은 4개의 현관입구가 빅토르 미하일로비치 바스니초프의 스케치에의하여 만들어진 모자이크다. 이 4개의 모자이크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언덕으로 향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책형','십자가를 벗는 예수', '성림강하'등 예수부활의 성경이야기를 소재로 하였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모자이크 11세기때부터 고대러시아 사원의 장식으로부터 시작된 건축 예술이다.
예까쩨리나 2세때 만들어진 귀족과 황족의 여자녀들을 위한 러시아 최초의 여자대학교가 있었고, 혁명당시 레닌이 이곳에 지휘본부를 두고 혁명을 지휘하였다. 레닌의 사무실은 혁명후 1918년 수도를 다시 모스크 바로 옮긴후 크레믈린으로 옮길때까지 이곳에 위치하였다. 사진에서 보 이는 사원건물은 지금 소규모의 발레나 음악회를 감상할 수 있는 극장 으로 이용되고, 좌측의 건물은 페테르부르트 국립대학교 사회학과 건물 로 우측은 이도시의 국유재산(부동산)관리소에서 사용하고 있다.


또한 수도원 주위의 거리는 조경과 공원이 아름다워 제정러시아시대는 각국의 대사관이 위치하였던 외교가로 유명하였고, 지금도 영국, 프랑스 , 독일등의 영사관이 위치하고 있고, 소련시대 KGB건물, 도시의 식물원등이 자리하고 있다.
피터폴 요새는 스웨덴과 북방전쟁에 대비해서 표트르대제의 명령에 의해 1703년 건축가 트레지닌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요새의 이름은 이도시의 수호천사인 러시아정교회 사도 표트르와 파벨의 이름에서 지어졌다. 외세의 침입이 잦던 이 지역과 당시 10만명의 이곳 주민들, 나아가서는 모든 슬라브인들을 하늘에서 부터 사도들이 내려와 북,서방의 적들로 부터 구원하고,보호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이야기는 요새의 3방향으로 나있는 출구중에서 정문에 해당하는 표트 르문상단에 조각그림으로 그려져있고, 표트르대제는 생존시 허락하지 않 았지만 후세 사람들은 러시아제국 창설자인 위대한 표트르대제를 사도 표트르에 비유하여 부르고있고, 도시의 이름인 페테르도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피터폴 요새는 스웨덴과 북방전쟁에 대비해서 표트르대제의 명령에 의해 1703년 건축가 트레지닌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요새의 이름은 이도시의 수호천사인 러시아정교회 사도 표트르와 파벨의 이름에서 지어졌다.
외세의 침입이 잦던 이 지역과 당시 10만명의 이곳 주민들, 나아가서는 모든 슬라브인들을 하늘에서 부터 사도들이 내려와 북, 서방의 적들로 부터 구원하고, 보호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이야기는 요새의 3방향으로 나있는 출구중에서 정문에 해당하는 표트르문 상단에 조각그림으로 그려져있고, 표트르대제는 생존시 허락하지 않았지만 후세사람들은 러시아제국 창설자인 위대한 표트르대제를 사도 표트르에 비유하여 부르고있고,도시의 이름인 페테르도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요새는 북서쪽의 파벨문과, 네바강으로 열려있는 남쪽의 출입문등이 있고, 이문을 통하여 러시아 최초의 군함이 표트르성당옆의 건물에서 만들어져 네바강과 핀란드만으로 띄어진다.


이곳은 이 도시 최초의 표트르성당(지금은 제정러시아의황제 표트르1세부터 마지막황제 니콜라이2세까지의 관이 안치되어 있다), 모스크바로부터 옮겨온 조폐국 건물, 피터의 신하들과 도시건설을 위해 초대된 네덜란드등 서유럽의 건축가들이 집무하던 건물, 소피아 삐로프스까야, 안나 이바노바, 고리끼등 제정러시아의 많은 학생과 혁명가들을 가두었던 감옥등이 있다.
성벽은 높이 2.4m-12m, 두께 3-8m로 만들어졌고, 네바강쪽의 성벽위에는 1917년 10월25일 21시45분 혁명를 알리는 포를 강건너 겨울궁전을 향해 쏘았던 대포가 놓여져있다.
이곳을 관리하는 노인께 작은 성의를 보이면 이곳에 올라 네바강의 경치와 함께 감상할 수 있다.
표트르문을 지나면 러시아 기념품들을 파는 작은 국가상점들이 있는데 이곳은 안타깝게도 국영 백화점과 함께 할인을 할 수 없다.
한번더 마지막 성벽문을 나와 이 도시의 최초의 목조다리(1714)를 건너면 물건을 할인할 수 있는 노점상들이 여행객들을 유혹한다.
반대쪽의 파벨문을 나오면 우측으로 상공을 날으며 도시 구경을 할수 있는 헬리콥터가 있고, 해자가 흐르는 다리옆으로는 작은 요트와 수상건물에 카페가 있다. 겨울에 이곳을 방문하는 여행객들의 아늑한 휴식처이기도 하다.


또한 성벽 맞은편 건너는 조국전쟁에서부터 대조국전쟁(2차대전)까지 나폴레옹군과 독일군한테 빼앗은 대포들을 전시해 놓은 전쟁 박물관과. 동물원, 놀이시설, 각종공연, 쇼를구경할 수 있는 뮤직홀이 있는 큰 공원이 있다. 이곳은 어린이들을 위한 장소이기도 하지만, 어른들을 위하여 술과 함께 장작불로 굽는 양고기 꼬치구이 샤실릭을 파는 휴계실이 곳곳에 있다.
여름엔 이곳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며 아리따운 러시아 여성들과 대화를 시도할 수 있는 곳이다.
러시아의 여성들은 외국인 특히 남성들에겐 매우 친절하다. 영어 혹은 짧은 러시아어라도 마음에 드는 여성이 있다면 망설이지말고 정중히 청한다면 사진 한장쯤은 같이 찍을 수 있을 것이다.
제정 러시아 문학속의 여자 인물들,당시 사교계의 미인들등으로 이곳 역시 남남북녀라는 말이 전해진다. 하지만 지금은 모스크바나 키예프 여성들이 더욱 예쁘고 친절한 느낌이다.


또한 공원이 위치한 이 페트로그라트섬안에는 군함 오라로호,피터대제가 초창기에 거주했던 작은 오두막집, 학생들과 배낭족들을 위한 젊은이들의 궁전(호텔, 극장, 대회의실, 카지노), 역시 작은 섬안에 지워진 시립 경기장이 선상호텔 피터호프와 마주하고 있다.
핀란드만쪽의 이 섬끝엔 여름에 산림욕과 일광욕을 즐기는 거대한 자작나무숲이 우거져 있다.
궁전광장의 길 건너편에는 니예프스키대로가 시작되는 해군본부가 서있다. 해군본부는 피터대제의 해군창설에 의해 1704년11월5일 만들어졌다. 1706년 의 큰홍수로 목조건물이었던 이곳은 유실되고, 지금의 석조건물로 지워진 것은 1732-1738년 건축가 카로보프에 의해 만들어 졌다.


니예프스키대로쪽의 정문은 넓은 공원의 분수를지나 서있다.
이 문의 높이는 72m로 위에는 망루와 뾰족한 모양의 황금탑으로 설계되었 다. 황금탑 밑부분에는 불, 물, 땅, 대기, 4계절, 4방향의 우주의조화, 그리스신화의 문예, 예술을 관장하는 여신 뮤즈등을 비유한 28개 조각품들 이 4방향으로 서있다.


정면의 긴 건물은 1806-1823년 건축가 자하로프에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길이가 407m에 이른다. 또한 이곳 네바강쪽의 후문은 궁전다리와 길을 사이에두고 동궁의 측면과 맞대고, 앞에는 큰 닻이 놓여져있다.
페테르부르크에는 국립에르미따쉬박물관 말고 또하나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궁전들이 근교도시에 자리들 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페테르부르크에서 서북방향으로 29km떨어져 핀란드만을 끼고 형성된 작은도시 페테르고프에 위치한 여름궁전이다.
이 대궁전은 길이 300m, 3층으로 지어진 작은 궁전이지만 이곳의 장관이라 고할 수 있는 계단식으로 이루어진 윗정원과 아랫공원의 경계라할 수 있는 윗정원 중심 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정문 현관부분은 육지쪽 윗정원 방향으로 되어있고, 후문 현관은 뱃길로 오는 손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아랫공원 핀란드만 방향으로 이루어져있다. 지금도 쾌속선이 다니고 있는 이 뱃길은 동궁(에르미따쉬 박물관)정문 네바강에서 출발하여 핀란드만을 지나 아랫공원 선착장에 다다른다. 이 길은 경호의 안전성때문에 황제들과 손님들이 육로보다 자주 이용했었다.




궁전은 지금은 1,2층만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계단을 오르면 입구엔 2차세계대전때 독일군들의 점령으로 인한 궁전과 도시의 피해 장면 사진들이 초기의 궁전건축 그림, 재건축사진등과 함께하며 첫번째방(시종, 황제비서진 집무실)을지나 황제들이 각국의 손님과 대상인들로 부터 인사와 선물을 받았 다는 아름다운 황금으로 이루어진 접견실을 지나면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사용했던 옥좌와 상단벽에는 제정러시아 황제들의 초상화가 걸려있는 연회실이 나온다.


궁전은 지금은 1,2층만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계단을 오르면 입구엔 2차세계대전때 독일군들의 점령으로 인한 궁전과 도시의 피해 장면 사진들이 초기의 궁전건축 그림, 재건축사진등과 함께하며 첫번째방(시종, 황제비서진 집무실)을지나 황제들이 각국의 손님과 대상인들로 부터 인사와 선물을 받았 다는 아름다운 황금으로 이루어진 접견실을 지나면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사용했던 옥좌와 상단벽에는 제정러시아 황제들의 초상화가 걸려있는 연회실이 나온다.


이곳은 피터대제가 북방전쟁에서 스웨덴으로 부터 승리하여 핀란드만을 통해 발틱해로 나갈 수 있는 대전과를 올린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의 구도로 1714 년공사를 시작하여 1723년8월15일 대궁전, 대폭포, 몬플레지르궁전등을 완성하 고 이미 이때 윗정원과 아랫공원의 기초가 다지어졌다.
각 분수들의 물공급을 위하여 1720-1721년 러시아의 수리학 기술자 바실리 뚜볼코프가 네덜란드와 프랑스로부터 배운 기술로 그의 지휘아래 자연 저수지에서 윗정원 수영장으로 물을 끌어들이고 이곳에서 16m경사진 아랫공원을 파이프와 관을 통해 분수의 물을 공급하고, 1721년 여름 아랫공원의 작은 운하와 갑문을 건설한다.
가장 특이한 점은 이곳에 물을 공급하고, 분수를 작동하기 위하여 수압에 의한 설비와 펌프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벌써 18세기 초에 발달된 러시아의 수리 기술을 이곳에서 우리는 볼 수 있다.


이도시는 피터대제 사후에도 2세기 가까이 많은 건축가, 조각가, 화가, 도금공, 주물공, 농민, 농노, 군인, 기술자들이 참여하여 화려 하고 장엄하게 확대 번성된다.
하지만 이곳은 대조국전쟁(2차세계대전)때 독일군의 점령으로 후퇴하는 소련군들이 문화재와 보물등을 갖고 철수하자 이에 독일군 들의 보복으로 대궁전등이 불타 많은 피해를 입었다.
1944년 독일군으로부터 소련군이 도시를 수복하였을때는 궁전과 공원의 각종조각품, 예술품들은 이미 남아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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