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쎄레메째보 공항 사이트 바로가기
러시아의 수도로 모스크바강을 끼고 있으며 인구는 850만, 면적은 880㎢이다. 
모스크바는 1147년 유리 돌고루키 왕자에 의해 세워졌으며 15세기부터 1712년 까지 그리고 1918년부터 현재까지 러시아 수도의 
자리를 지켜왔다. 
혁명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도시 모스크바. 레닌, 스탈린, 차이코프스키, 푸쉬킨, 톨스토이등 세계사와 문학. 예술사를 뒤흔든 
인물들의 동상이 곳곳에 세워져 있고 7개의 스탈린식 건물과 크레믈린 궁전의 장엄함이 도시를 압도하고 있다. 
어디를 가도 극장, 콘서트홀, 박물관, 미술관이 있는 예술의 도시 모스크바 크레믈린과 붉은광장은 모스크바 여행의 시작, 정치 
중심지이기도 한 이곳을 중심으로 모스크바 도로는 방사선처럼 뻗어 있다. 크레믈린 궁전의 크고 둥근 지붕 위에 꽂혀 있는 
붉은 깃발은 러시아의 상징이며, 과거 세계 정치의 반은 이곳에 모여 있는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움직여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러시아 최고의 모스크바는 이 나라 정치, 문화, 경제, 과학, 산업의 중심지이며 러시아 건축과 도시계획,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산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대륙성 기후를 보이며, 연평균기온 4.4℃, 1월평균기온 -9.9℃, 7월평균기온 19℃이다. 
여름에는 일조시간이 길고 온도는 비교적 낮은 편이다. 
겨울에는 흐린 날이 계속되고 12월 한달의 일조시간은 평균 20시간, 1월은 30시간 정도이다. 
기온의 연간 변동이 크고 한난의 차이가 심하여 거주조건은 좋지 않다. 연강수량은 575㎜, 여름과 가을에 많은 비가 내린다. 
적설량은 400㎜ 정도이다. 
11세기 말에 이미 상당한 규모의 군락이 이루어졌으며, 시의 이름이 연대기의 기록상에 처음 나타난 것은 1147년이다. 
당시에는 이곳이 수즈달공(公) Y. 돌고루키의 영지였으므로, 오늘날에는 그를 시(市)의 창시자로 보고 있다.
모스크바가 본격적으로 발전되기 시작한 것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공의 아들인 다닐 알렉산드로비치가 1276년 무렵에 이곳을 
모스크바 대공국의 수도로 정하면서부터이다. 모스크바대공국은 지리적인 이점과 역대 여러 공작의 교묘한 내외정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는데, 이와 더불어 모스크바도 점점 영토가 확장되고 세력이 강해졌다. 
14세기 전반 이반 1세 때에 북동러시아의 정치·종교의 중심이 되었다. 14세기 후반부터 계속된 킵차크한국(타타르)의 지배에
대하여 러시아인의 반타타르 투쟁이 일어났으며, 모스크바는 그 중심적 역할을 하였고, 1380년에는 모스크바 대공 D. 돈스
코이가 클리코보전투에서 처음으로 타타르의 대군을 격파하였다.
15세기 후반 이반 3세 때에 러시아가 킵차크한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시는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했다. 크렘린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춘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16세기에 들어와서 모스크바는 외적(특히 크림타타르)의 침입에 대비하여 견고한 방벽을 구축하였다. 키타이고로드가 1535∼
38년에, 그 바깥쪽의 벨리고로드가 86∼93년에 석조성벽(19세기초 철거, 지금은 순환도로가 됨)으로 둘러싸였다. 
또한 제 3 제믈랴노이 발(土城)이 91∼92년에 구축되었다. 주변에는 요새화된 수도원이 배치되었다. 시는 류리크왕조 단절 후 
동란시대(1610∼12)에 폴란드군에 점령되어 큰 피해를 입었으나, 로마노프왕조 성립 후 곧 부흥하여 시역(市域)도 제믈랴노이 
발을 넘어 확대되었고, 17세기 중엽에는 인구도 20만에 달했다. 
표트르대제 때인 1712년, 수도는 새로 건설된 페테르스부르크(현재의 레닌그라드)로 옮겨졌다. 
그러나 모스크바는 제 2 의 도시로서 여전히 경제·문화의 중심지로서의 구실을 했다. 
18세기 초에 이미 일반시민을 위한 학교교육의 기초가 잡혔으며, 55년에는 러시아 최초의 대학인 모스크바대학이 창설되었다. 
또한 최초의 공공극장이 개설되었으며, 신문이 발행되었다.
1812년 나폴레옹군대의 모스크바침공 때 모스크바를 뒤덮은 대화재는 1주일 동안 계속되어 시 전체의 3/4이 소실되었다. 
나폴레옹군대는 39일 후에 물러갔으나, 그에 앞서 크렘린의 일부를 폭파했다. 전쟁 후 곧 모스크바시 건설위원회가 발족되어 
모스크바는 급속하게 재건되었다. 크렘린의 서쪽을 흐르는 네글린나야강이 복개되었고 그 위에 알렉산드로프스키공원을 
만들었다. 
벨리고로드의 성벽과 제믈랴노이 발이 철거되었고, 볼쇼이극장과 마리극장 등이 건조되었다. 시의 주거조건도 개선되었으며, 
공공 교통의 발달이 두드러졌다.
또 40년대에는 최초의 공공 교통기관인 대형 4륜마차가, 70년대에는 마차철도가, 99년에는 전차가 달리기 시작하였다. 
인구도 27년에는 나폴레옹전쟁 전의 수준을 넘었고(27만 5000), 62년에는 31만 7000명이 되었다. 농노해방(1861) 이후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여 97년에는 100만 명을 넘었다. 
20세기 초에 90% 이상의 가옥은 단층이나 2층건물이었고 도시정비의 혜택을 받은 것은 시 중심부에 사는 사람들뿐이었으며, 
70%이상의 주민은 기본적인 설비도 갖추어지지 않은 좁은 주거공간에서 많은 사람이 함께 생활하였다. 모스크바는 러시아
혁명의 주요 무대가 되었고, 10월혁명 후 1918년 3월 11일 소비에트정권은 페트로그라드(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 옮겨, 
모스크바는 다시 수도가 되었다. 그 후 내전을 극복한 소련은 모스크바를 거점으로 사회주의건설에 착수했다. 
40년 모스크바의 전체 공업생산은 제 1 차세계대전 전(1913)의 2배에 이르렀다. 35년에는 지하철의 건설이 시작되었고, 
인구도 증가하여 39년에는 454만 명에 이르렀다. 제 2 차세계대전은 소련에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대전 후에 놀랄만큼 
빠른 속도로 재건되고 발전하여 50년 모스크바의 공업생산고는 전쟁 전(1940)의 2배에 달했고, 64년에는 4.9배가 되어 
세계에서 손꼽히는 대도시로 성장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모스크바는 교통의 중심지로서 4개의 공항, 10개선의 철도 및 1호에서 11호에 이르는 연방도로와 3개의 하항(河港) 등에 
의해 러시아연방의 주요 도시 및 외국과 연결된다. 시 북쪽 교외에 있는 셰레메티에보공항은 광대한 러시아 각지를 연결하는 
항공망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철도도 원거리수송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지만 근래에는 장거리보다는 모스크바
근교의 도시나 마을을 연결하는 기능이 높아지고, 통근·레크리에이션 등에 이용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시내에서는 승객
수송에서 차지하는 시영전차(市營電車)의 중요도는 점차적으로는 낮아지고, 대신 지하철이 발달하였으며, 그 노선의 길이가 
208㎞(1985)에 달하고 있다. 
승객수송에 있어서는 버스를 앞질러서 42%(24억 9200만, 1985)를 지하철이 맡고 있다. 버스 또한 시내 승객의 수송에 있어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밖에 근교버스를 비롯하여 원거리버스의 교통도 발달하였다. 시내에 있는 3개의 하항은 
물자의 반입·반출과 여객수송의 발착점으로서도 이용되고 있다. 여기에서 볼가강 하구의 아스트라한까지 이어지는 장대한 
항로와 모스크바 근교의 각지를 연결하는 단거리항로도 있고, 수중익선이 시내 관광뿐만 아니라 근교항로에도 취항하고 있다.
모스크바 시내는 보통 3지대로 나뉜다. 사드보이 순환도로 안이 도심이며, 여기에 행정·상업·문화시설이 집중되어 있다. 
그 바깥쪽 1960년대까지의 시역(市域)이 중간지대로 크렘린까지 평균 7.4㎞이고 공업·주택지구·철도터미널 등이 있으며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제 3 지대는 신시역(新市域)으로 크렘린까지 평균 14㎞이며 시 전체 면적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 지대가 모스크바의 새 주택단지 조성지이고 녹지도 많다. 여기까지가 주요 시역으로 전체 길이 109㎞의 순환 도로가 
시역을 구분하고 있다. 여기에서부터 바깥쪽이 삼림공원지대(너비 10∼15㎞, 넓이 1800㎢)이며, 도시와 마을이 흩어져 있고 
15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 바깥쪽에 근교지대가 있으며, 모스크바시의 경계로부터 50∼70㎞의 범위 안에 있다. 이 지역에는 80여 개의 도시와 마을이 
있고, 250만 명이 넘는 인구가 살며, 모스크바 시내로의 통근지대에 들어가며 이 지대까지를 모스크바 메갈로폴리스(모스
크바대도시권)라고 한다. 모스크바의 도시계획에서는 토지이용의 집약화, 명확한 기능구분, 교통망의 정비, 환경보전 등 각종 
문제 해결에 중점을 두고 있다. 또한 모스크바뿐만 아니라 모스크바도시권의 정비도 고려하여 계획이 추진되고 있다. 
그러나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는 것은 모스크바의 팽창을 막기 위하여 일찍부터 인구제한을 시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와 
그 주변도시에 대한 인구집중이 계획을 웃도는 속도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역사 및 문화의 산 증거이다. 둘레는 2,235m이고 벽 위에는 20개의 망루가 있고 대회궁전, 레닌묘, 레닌상, 스파스카야탑, 12사도 사원, 이반대제의 종루, 궁전병기고, 크레믈린극장 등이 있다. 1485-95년에 러시아인과 이탈리아인의 합작으로 현재의 성벽이 건축되었다.
16세기 이반뇌제의 통치기간 중 크레믈린은 황금시대를 맞이하였다.
18세기 표트르 1세가 수도를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이전하면서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1812년 나폴레옹의 침략시 러시아는 수도를 불태우는 초토화 작전으로 격퇴 했는데 이 때 크레믈린도 소실되었다.
국립 역사 박물관과 백화점과 바실리 사원등 볼 것이 많은 곳이다. 고대 러시아어로 아름다운 이쁜이라는 뜻으로 아름다운 광장이라고 불리워 졌으나 혁명기념일에는 온통 광장이 붉은색으로 넘쳐나기 때문에 지금은 붉은 광장으로 불리게 되었다.


지금도 살아있었을 때 그대로의 모습인 레닌의 묘와 바실리 사원 모스크바 최대의 백화점등을 볼 수 있다.


넓이는 73,000㎡이며 레닌묘, 바실리사원, 미닌과 포잘스키동상, 국립역사 박물관, 굼백화점(모스크바 최대)등의 명소가 있다.


러시아어로 "붉다"는 "아름답다"는 뜻도 갖고 있다. 17세기때부터 "붉은 광장" 이라는 이름이 역사에 등장하게 되며, 지금과 같은 모습(길이 695m, 평균 폭 130m)으로 된 것은 19세기 말 무렵이다.


종교를 공식적으로는 부정하는 소련에서도 레닌만은 신격화된 존재인 듯하다.


레닌은 1924년 1월 21일에 숨을 거두었는데, 그 3일 후에는 최초의 레닌 묘가 알렉세이 시추세프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1929년에는 적토색의 화강암 건조물로 다시 지어졌다.
피라밋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데, 유서있는 크렘린의 건물들과 잘 어울린다.
붉은 광장 내 레닌 묘 맞은 편에 길게 세워져 있는 베이지 색의 건물이 러시아 최대의 국영백화점인 굼(Gum)이다.


1890년에 지어진 오래된 건물이지만 1950년대에 대폭적인 수리가 이루어져 오늘날까지도 러시아에서는 최고급 백화점으로 손꼽히고 있다.


3층 높이의 이 건물의 1, 2층에는 200여점에 이르는 최고급 외제산 상점들이 위치하여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다.
붉은 광장 진입로로 들어서는 모든 관광객들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아 버리는 아름다우면서도 묘한 느낌을 주는 성바실리 성당. 200여년간 러시아를 점령하고 있던 몽골의 카잔 한(汗)을 항복시킨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반 4세-러시아의 황제(재위:1533∼1584)-의 명령으로 지어진 건축물로, 사원의 이름은 이반 대제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수도사 바실리에서 유래되었 다고 한다. 1555년에 착공해 1561년에 이르러서야 완성되자 이반 대제는 그 아름다움에 탄복, 더 이상 이와 같은 성당을 짓지 못하라는 뜻으로 설계자인 포스토닉과 바르마의 두 눈을 뽑아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각양 각색의 색채와 무늬를 자랑하는 9개의 양파형 돔 지붕으로 이루어진 이 그리스 정교 사원은 가장 러시아적이면서도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특색있는 건축물로 정평이 나 있다.


오늘날에는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성 바실리 사원 앞에는 1612년, 폴란드 의 침입으로부터 모스크바를 지켜낸 니즈니 노브고르드 출신의 정육점 주인 "미닌"과 수즈달의 대공이었던 "포자르스키" 두 사람을 기념하는 동상이 서 있다. 원래 광장의 한가운데 서 있던 이 동상은 1936년, 붉은 광장에 레닌의 묘가 들어서면서 현재의 장소로 옮겨졌다.
7-8갈래의 길이 모여 있다. 광장 한 가운데에 동상이 서 있고, 차들은 이 동상을 중심으로 시계반대 방향으로 달리고 있다.
그 동상은 베르진스키로 혁명에 참가하였다가 초대 내무 대신을 지낸 사람이다.
여기에는 KGB본부가 있는데, 광장 북쪽의 8층짜리 크림색 건물이 바로 그것이다.
모스크바에서는 세계 일류의 발레, 오페라, 클래식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 이들은 17,18세기에 서구에서 들어온 것을 바탕으로 로맨티시즘, 리얼리티, 소셜 리얼리즘의 영향을 받아 태어난 불멸의 예술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예술의 한 가운데에 볼쇼이 극장이 있다.


1776년에 건립되어 200여년이 넘는 세월동안 러시아는 물론 전세계의 발레, 오페라, 그리고 연극예술에 지대한 공헌을 해 온 볼쇼이 극장에서는 순회 공연을 떠나는 여름 시즌을 제외하고는 항상 최고 수준의 공연을 감상할 수 있다. 지붕 위에 말 4필이 끄는 로마식의 사두전차는 이 곳에서부터 세계로 훌륭한 예술을 제공한다는 기개를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1776년에 창립되어 한 차례의 화재를 입은 뒤, 1824년에 안드레이 미하이로프와 오시프 보베가 다시 지었다. 이 곳에서 탄생된 발레나 오페라의 명작은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역사의 무게가 실감나게 전해져온다.


안타깝게도 러시아 정부의 지원을 제대로 받고 있지 못한 현상황에서 극장시설이 낙후, 현재 2억 달러의 비용이 드는 보수비를 지원하기 위해 전세계의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모금활동이 전개되고 있다
1985년부터 10년간 건설하여 1995년 5월 전승 50주년을 기해 완공했다. 이 곳은 과거 러시아 군대의 출정식과 승리 후 귀환시 기념행사를 하던 곳 으로, 나폴레옹 전쟁 후 쿠투조프 장군(나폴레옹을 물리친 러시아의 성장)이 여기에서 기념식을 가졌다.


기념관 앞의 탑에는 게오르기라는 러시아정교 승리의 신과 2차 세계대전 당시의 격전지 이름이 조각되어 있다. 탑의 높이는 141.7m. 전승기념관은 지하와 1,2층으로 되어 있으며, 2층 에는 전승 50주년을 기념하여 정부에서 제작한 칼과 방패가 있다.


1939년 독소 불가침 조약부터 일본의 항복문서에 이르기 까지 2차 세계대전의 역사적 유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2층 중앙 홀은 지름이 50m, 높이가 25m이며, 11만 7천명의 훈장 수여자들의 명단이 각인되어 있다
모스크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오스탄키노 텔레비젼 중계 탑을 제외하고는 이 레닌 언덕이 제일 높다. 이곳은 다른 곳보다 높아 해발 115m 로 우리의 기준으로는 언덕도 아니지만 산(山)을 보지 못하는 모스크바인에 게는 산(山)인 것이다.


여름이면 이곳에서 날씨가 좋으면 모스크바 시내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특히 주말이면 무명용사의 묘에 헌화를 한 신혼 부부들이 이 곳으로 이동을 하는데, 이 또한 러시아의 결혼풍속도를 알 수 있는 좋은 구경거리가 된다.


최근 레닌 언덕이라는 이름에서 1924년 이전에 불려졌었던 참새의 언덕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모스크바 대학에 재학 중이었던 게르첸과 오가료크가 이곳에서 러시아의 혁명가가 되기를 결심한 곳으로 유명한데, 이곳에서 강 건너 정면에 보이는 루즈니키 경기장은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때 주 경기장을 쓰였으며, 여러 종목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 었던 곳이다. 총 수용인원수는 10만 명 정도이다.
모스크바 대학의 창설자는 학자 로마노소프이다.
원래 대학 건물은 크렘린 북쪽에 있었으나. 1953년 스탈린 양식의 새 캠퍼스가 완성되면서 지금 장소로 이전하였다.


건물은 높이가 240m이고 정면의 길이가 450m나 되어 스탈린 양식의 건축물 가운데 가장 크다. 중앙의 30층 짜리 건물 부분은 대학의 관리부가 있는 관리탑이고 이 양 옆의 17층짜리 날개 부분은 학생 기숙사로 사용되고 있다.


정식명칭은 `M.V.로모노소프 기념 국립모스크바대학'으로 1755년에 설립되었다. 이 대학에서 배출한 유명한 사람으로는 혁명적 사상가 라디시쳬프, 게르첸, 역사가 그라노프스키, 평론가 벨린스키, 교육사상가 우신스키 등이 있다. 20세기 초두의 사회적인 변혁기에는 학생운동의 고조로 창설당시의 학부는 철학, 법학, 의학 등의 3개 학부에서 혁명 후 대폭 증설하였다. 1987년에 공학, 수학, 컴퓨터 수학 및 사이버네틱스, 아시아, 아프리카 국제연구소를 비롯하여 각종 부속 연구소와 도서관을 갖게 되었다.


교수의 총 수는 8,000여 명 이상이고, 그 중 1,000여 명이 박사학위 이상을 가지고 있다. 대학 건물은 구 교사가 마르크스 거리와 게르첸 거리에 면한 도심에 있고, 신교사는 1949년부터 1970년까지 건설되었다. 관광객들이 찾는 본관 건물은 높이 240m의 32층 건물로서 정면의 길이는 450m이고, 4500개의 강의실이 있으며, 이 건물을 다 둘러보려면 145km를 걸어야 한다. 건물은 스탈린 양식의 대표적인 건물로서 아주 웅대한 느낌을 받는다.
푸시킨 박물관은 1898년 짓기 시작하여 1912년에 문을 열었다.
이 박물관은 페테르부르크에 이어 러시아에서 두 번째로 유럽의 예술품들을 모아 놓은 박물관이다.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많은 수집품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의 그림들이 많이 소장되어 있다. 그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단연 반고흐(van Gogh)의 빨간 포도 동산(Red Vineyard at Arles)이다. 그 그림은 그가 그의 생애 에서 팔았던 단 한 점의 그림이다. 그 외에도 피카소와 다른 유럽 거장들의 작품들이 많이 있다.
이 소장품들은 학생들의 시각 교재로서 큰 효용이 있다.


- 정기휴일: 월요일
- 개관시간: 화-일요일10:00-19:00


※ A.S. 푸쉬킨 (Aleksandr Sergeevich Pushkin : 1799.6.6∼1837.2.10)
러시아 시인. 모스크바 출생. 러시아 국민문학의 창시자이다.
유서깊은 명문 귀족집안에서 태어나 1811년 차르스코에셀로(지금의 푸슈킨시)에 개설된 귀족학교 리체이에 입학, 자유주의적 교풍 속에서 1814년 <나의 친구, 시인에게>를 발표하여 문학계에 첫발을 들여놓았다.


처음엔 선배이자 낭만주의 시인인 K.N.바튜슈코프, V.A.주코프스키 등 17.18세기 프랑스 시인들의 시풍을 따랐다. 1817년 리체이를 졸업하고 외무성에 근무하며 수도 페테르부르크에서 혁명적 사상가 P.Y.차다예프와 사귀고, 러시아 전제정치를 타도하려 한 무장봉기단체 데카브리스트의 그룹에 참여하는 등, 농노제 타도정치 사상이 확고해졌다.


데카브리스트의 사상에 공명하여 자유를 사랑하는 내용의 송시 <자유>(1817), 농노제 붕괴를 예언한 <농촌>(1819) 등 일련의 과격한 정치적 시를 써서 남러시아로 추방되었다.


G.G.바이런의 영향을 받은 그는 그곳에서 <카프카스의 포로>(1822), <도둑 형제>(1821∼22), <바흐치사라이의 샘>(1821∼23) 등의 작품 소재를 얻었다. 1820년 러시아 민간전승에서 취재한 동화풍 담시 <루슬란과 류드밀라>를 발표하여 젊은 세대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다.


러시아 문학사상 최초의 리얼리즘 작품인 <예프게니 오네긴>을 쓰기 시작한 1823년 무렵에는 낭만주의 한계를 의식하게 되었으며, <집시>(1824)에서 바이런적 주인공에 대한 비판의 눈길로 개인과 사회, 자유와 운명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24년 무신론을 긍정한 편지가 압수되면서 미하일로프스코에 마을에 연금된 동안, 비극시 <보리스 고두노프>(1825), 풍자적 서사시 <누손백작>(1825) 등을 완성하였다. 그는 고독하고 불우한 유폐생활을 통해서 사상적.예술적 성장을 하게 되고 러시아 국민시인으로 성숙하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26년 황제 니콜라이 1세의 특사로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그뒤 만년까지 관헌의 엄중한 감시와 검열을 받았다. 아버지가 물려준 니제고르드주에 갔을 때 콜레라로 발이 묶인 3개월이 창작의 정점을 이루는 시기가 되었는데, 단편소설집 <벨킨 이야기>, 4편의 작은 비극<돌의 손님>, <인색한 기사>,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질병 때의 주연(酒宴)> 등 50편의 작품을 썼으며, <예프게니 오네긴>의 기본적 부분도 이때 완성되었다.


나탈리야와의 결혼은 비극의 시작이 되었다. 궁정행사에 그녀가 참석하기를 바라는 황제에 의하여 푸슈킨은 시종보로 임명되었다.
이는 창작하는 시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으나, 세속권력과의 충돌 속에서 역사적 시야를 확대해 간 그는 표트르대제의 공적을 기리면서 그 희생이 된 페테르부르크 소시민의 비극을 묘사한 서사시 <청동의 기사>(1833), 소설 <스페이드 여왕>(1834), 역사소설 <대위의 딸> 등을 발표했다. 1937년에 자신의 아내와 염문을 일으킨 프랑스인과의 결투 도중에 치명상을 입고 사망했다.
고르끼 공원 근처에 위치한 트레치야꼬프 미술관은 1892년, 트레치야꼬프라는 상인이 수집한 약 4000점의 작품들을 진열용 건물과 함께 정부에 기증한 것을 시작하여 현재는 약 5만점이나 되는 명작들이 50개가 넘는 전시실에 소장되어 있다. 14세기말에 활약한 천재화가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걸작 "삼위일체"를 포함, 주로 11세기 이후 제정 러시아 시대의 화려한 미술품들이 많다.


- 정기휴일: 월요일
- 개관시간: 화-일요일10:00-18:30
- 지하철역: 뜨레치야꼽스까야, 빨리안까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때 여러 종목의 운동 경기가 행해졌던 곳이다. 레닌 중앙 스타디움은 그 메인 스타디움으로 10만 3천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경기장이다.
우리 나라로 보면 명동 거리와 같은 곳으로 입구에서 외무성 건물까지 약 2km 정도이다. 거리가 생긴 것은 15세기이며 더 유명한 것은 러시아의 대문호 푸쉬킨이 이 거리 No.53 의 2층 집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옛날에 아르바트 거리는 귀족들의 저택이 한적하게 들어서 있던 곳으로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들이 어린 시절을 보내기도 한 곳이다.
주변으로 각종 전문 직업인들이 모여들어 골목마다 목공골목, 대장간 골목, 과자와 빵 골목, 음식점 골목, 식탁보 골목 등의 이름이 붙여 있다.


아르바트는 번화한 거리로 변모하여 한쪽에서 소규모의 악단이 연주를 하는가 하며, 시를 낭송하기도 하고,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한다. 그러나 노브이 아르바트 거리에는 지금 거의 외국 브랜드 상점과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기념품 가게와 노점상 등이 있어 러시아의 현주소를 잘 말해주고있다. 아르바트 거리는 페레스트로이카의 물결이 가장 먼저 인 곳이자, 개혁과 개방의 거센 바람을 주도했던 곳이기도 하다. 모스크바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이 거리는 러시아 젊은이들의 혼이 숨쉬는 곳이다. 무명화가들의 고향이자 이름없는 화가, 연극배우, 가수들의 안식처이자 전시장이고 무대이며 히피들의 마음의 고향이다. 1988년 "아르바뜨의 아이들"이라는 소설이 국내에 소개됐고,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었다.


거리의 악사들이 연주하는 재즈음악을 배경음악으로 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모습으로 그림처럼 지나간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무명화가들, 배우들, 브레이크 댄스를 추는 소년들, 노천카페에서 차를 마시는 사람들, 친구들, 연인들, 모두 풋풋한 젊음을 보이고 있다.


러시아 젊은이들의 자유 영혼이 숨쉬는 아르바트 거리 한쪽에는 우리에게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는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 바로 '빅토르 초이! 아르바트 거리 한쪽, 길이 100m가 채 안되는 골목에는 빅토르 초이의 성전(?)이 있다. 이 골목은 초이가 무명 가수일 때 노래를 부르던 곳이었다.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등진 이후 이곳은 초이를 위한 성전이 되었다. 골목 담벼락에는 초이를 기리는 낙서들과 사진으로 가득했다. '초이를 사랑 한다.' '초이는 영원하다'... 같은 내용들이라고 한다. 한 구석에는 누가 갖다두었지 싱싱한 장미꽃이 한다발 놓여져 있고, 담배불이 향처럼 피어오르고 있다. 빅토르 초이는 한국인 3세로 아버지 쪽이 고려인이다. 락밴드 '키노'를 이끌었고 글도 쓰고 영화도 만들었다. 영화를 사랑했던 초이는 영화를 직접 감독하고 출연까지 했었다. 그의 노래 모두는 4장의 앨범으로 나왔다.
그 앨범 모두가 러시아 젊은이들의 가슴에 강하게 자리잡았고, 1991년 33세의 젊은 나이로 자동차 사고로 요절하면서 그의 노래와 이야기는 신화가 되어 러시아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 지하철역: 아르바츠까야
원래는 크레믈린의 출성 이었느데 지금은 여자 수도원이다. 16세기말 모스크바강을 넘어 쳐들어온 타타르군을 12개의 망루에서 발견하여 포격을 가하기도 했고, 17세기 폴란드와 동맹관계에 있던 리투아니아가 진격해 오는 것을 포자르스키가 이곳에서 출격하여 섬멸하기도 했다. 수도원에 있는 건물모두가 16세기 러시아 건축을 대표하는 건물들이다. 망루에서 포격을 하던 곳이다.
사원을 둘러보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마야콥스키 같은 유명인들이 안치되어 있는 묘지다. 수도원은 녹음이 무성해서 계절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o 정기휴일: 화요일
o 지하철역: 스뽀르찌브나야에서 약 15분 소요
o 입장시간: 11:00-16:30
볼가강 유역에 있는 오카강의 왼쪽 지류에 자리잡은 모스크바강은 길이 502km, 유역면적 1만 7,500㎢에 이른다. 스몰렌스크-모스크바고원에서 발원하여 남동쪽으로 흐르며, 평균유량은 모스크바에서 53.5㎥/sec이다.


11월 후반에서 4월 전반까지 얼어붙는다. 모스크바 운하에 의해 볼가강과 연결되며, 이 운하의 하류쪽은 항행이 가능하다. 상류의 모자이스크 부근에 모자이스크 저수지가 있다.
강 연변에는 모스크바·모자이스크·콜롬나·즈베니고로드 등의 도시가 자리하며 별장지가 많다.


길이 128km의 모스크바 운하는 모스크바강과 볼가강을 잇고 있다.
1932년말 착공하여 37년 7월 완공된 이 운하에는 9개의 갑문과 6개의 저수지, 8개의 발전소가 있다. 이 운하가 건설됨으로써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간의 수로가 1,100km 단축되고, 모스크바강의 홍수를 방지할 수 있게 되었으며, 모스크바에 상수도 물을 공급하고 발전량이 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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